외상 경험은 단순히 기억 속에만 남지 않고, 몸속 깊이 각인되어 다양한 신체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트라우마 이후에 우리 몸이 보이는 무의식적인 반응들은 단순한 스트레스 반응이 아닌,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방어 메커니즘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외상 이후에 자주 나타나는 대표적인 신체 반응인 ‘근육 긴장’, ‘회피 행동’, ‘감각 기억’에 대해 심자세히 살펴보고, 그 이해를 통해 보다 나은 회복 방향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근육긴장: 외상의 물리적 흔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 부위의 근육이 긴장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단순히 긴 하루를 보내서 어깨가 뻐근한 것과는 다르며, 신체가 외상 당시의 위험을 ‘지금도 유효한 위협’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어깨, 목, 턱, 허리, 골반 등의 부위가 자주 영향을 받으며, 특히 장기적인 외상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러한 긴장이 습관처럼 굳어져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골반 근육의 만성적 긴장은 성폭력 생존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이며, 이는 성적인 위협에 대한 몸의 방어 반응이 무의식 중에 계속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근육 긴장은 스트레칭이나 마사지 같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잘 풀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근육 자체의 물리적 문제라기보다는, 뇌와 신경계가 여전히 “지금도 위험하다”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동기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턱을 꽉 무는 습관이나 눈 주위의 미세 긴장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표현하지 못한 두려움과 불안이 몸에 고착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 이러한 긴장은 편두통, 만성 피로, 어지러움증 등 다양한 신체 증상으로 이어지며,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근육 긴장을 단순한 신체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으로 이해하고 이에 맞는 심리적·신체적 통합 치료가 필요합니다.
2. 회피행동: 몸이 기억하는 피신 본능
트라우마 이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정 장소, 사람, 상황을 피하려는 행동을 보입니다. 이는 단순한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강도 사건을 겪은 사람은 사람들이 많은 장소나 밤늦은 골목을 절대 혼자 가지 않으려 하고,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차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며 도로 근처에 가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이 회피 행동은 의식적으로 ‘나는 이 상황이 싫으니 피하겠다’는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뇌가 자동으로 ‘이 자극은 위험하다’고 인식한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회피가 장기화되면 일상생활의 제한, 사회적 고립, 우울감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애초에 ‘위험하지 않은 상황’조차 위험하게 느끼며, 과도하게 방어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학교생활, 직장생활, 대인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주며, 심지어 자아 정체성 형성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신체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회피는 교감신경계의 예민함을 지속시키며, 수면 장애, 소화불량, 만성 피로, 두통 등의 다양한 신체 증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트라우마 회복 과정에서는 이러한 회피 행동을 단순한 ‘겁’이나 ‘나약함’으로 보지 않고, 신체 반응으로 인식하고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전한 환경에서 점진적 노출을 시도하거나, 신체 기반의 안정화 기법을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몸이 느끼는 불안은 말로 설득해서는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안정과 실제 안전함을 함께 제공해 주는 방식이 회복의 핵심입니다.
3. 감각기억: 말로 표현되지 않는 기억의 형태
트라우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억’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몸에 저장됩니다. 특히 심각한 외상 상황에서는 뇌의 언어 처리 영역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되고, 대신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감각 기억 영역이 활성화됩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소리, 냄새, 빛, 촉감 등이 감정과 함께 신체에 각인되며, 이후 특정 자극에 노출되었을 때 긴장의 고조, 공황 발작, 호흡 곤란 등 강렬한 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감각 기억은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모호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왜 특정 냄새를 맡았을 때 갑자기 불안해지는지, 왜 특정 옷감의 촉감이 불편한지 알 수 없을 때, 그것은 감각 기억의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감각 기반의 외상 기억은 전통적인 대화 중심 치료에서는 접근이 어렵습니다. 환자가 명확하게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설명할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억은 몸이 반응할 때 관찰하고 다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소마틱 경험법(SE)이나 감각 인식 훈련, 트라우마 중심 요가, 안구운동 둔감화 등이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은 감각과 신체 반응을 중심으로 외상 기억을 재처리하거나, 신체와의 연결을 회복하도록 돕는 방법입니다.
감각 기억은 외상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깊은 흔적 중 하나이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선 ‘몸’이 그 경험을 안전하게 다시 경험하고,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학습해야 합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을 무시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외상 회복의 진정한 시작입니다.
결론
외상 후 신체 반응은 단순히 심리적 충격을 넘어서, 몸 전체가 기억하고 반응하는 복합적 현상입니다. 근육의 긴장, 회피 행동, 감각 기억은 우리 몸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메커니즘입니다. 이들 반응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며, 신체 중심의 트라우마 치유법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접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회복을 위한 첫 발걸음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